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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아르스비테 발행인 | 중앙 Sunday 제554호

삶의 방식 스물여덟 번째 질문 인간 여정의 숭고함

지난 추석 연휴, 카나리아 군도 7개 섬 중 하나인 테네리페에 아홉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나와 유럽인 지인이 초대한 리트리트(retreat·피정, 묵상회, 연수회 등의 의미) 참가자들이다. 바람이 불면 부채처럼 넓은 바나나 잎들이 사사삭 서로 비벼대는 소리가 듣기 좋은 조용한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처음 만나는 사이다. 이들은 각각 태어난 곳과 걸어온 길이 다르다. 무엇보다 영적 배경이 다르다. 천주교 사제, 선불교 승려, 무슬림 기업인, 무신론을 추구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티스 트, 힌두교 변호사, 심리상담 전공자 등 개인적으로 마음세계에 관심이 있거나 직업이 종교인이지만 몸담고 있는 영적 전통은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들에게 요구한 것은 각자의 이야기와 수행방법을 가져와 달라는 것뿐이다. 예로부터 많은 현자가 비유를 들거나 그들만의 특별한 수행방법을 통해 가르쳤던 것처럼. 이들을 초대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두 가지다. 영적, 종교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배우는 것. 그리고 마음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외로움, 경험 등을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이 리트리트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마음을 열고 이 그룹의 에너지가 이끄는 대로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리트리트가 시작되자마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참가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자기의 삶 속에서 또는 구도의 길 위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속살 그대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진솔하게 드러냈다. 오랜 세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해 온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이야기는 생각의 작은 변화와 마음의 미세한 흔들림마저도 섬세하게 잡아내 솔직하게 보여 줬다. 지식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단 한마디의 진리로 깨부숴져 인생이 바뀐 이야기, 문명의 불빛과 소음이라고는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서 만난 자기 자신, 인생의 가장 외로운 시점에 가슴 깊이 와 닿은 성인의 가르침, 자기가 평생 거부했던 운명을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된 인생의 아이러니 등 서로의 이야기에 우리는 때로는 깊이 공감했고, 때로는 감동에 젖었다.

모든 참가자들은 서로의 구도의 길을 열린 마음으로 존중했다. 선불교식 좌선을 같이 했고, 힌두교식 의식에 참여했으며,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만의 만다라를 같이 만들었고, 가톨릭 사제의 묵상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이 사제의 독백이 끝났을 때 불교승려가 일어나 깊이 머리 숙여 그의 진정성에 감사의 절을 하고 사제 역시 맞절을 하는 뜻밖의 감동적인 광경에는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눈물을 보였다.

나흘간의 짧은 리트리트가 끝날 무렵, 우리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같이 했음을 느꼈다.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종교와 믿음의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는 각자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돌아 볼 수 있었고, 때로는 한없이 약하고 때로는 한없이 강한 인간의 공통된 여정에 무한한 연민과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은 소중하며,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한곳을 바라본다는 것을 경험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간 뒤 가톨릭 사제는 이번 경험을 통해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든, 아름다움 또는 자연이라고 일컫든, 인간은 누구나 한없이 숭고한 그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고 전해 왔다. 종교와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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